영화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는 100년 가까이 지난 고전이 어떻게 지금 세대의 감성과도 통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시대를 초월해 계속 회자되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1925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20세기 미국 문학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2013년에 개봉한 바즈 루어만 감독의 영화는 시각적 화려함과 현대적인 연출, 그리고 디카프리오의 열연이 어우러져 다시금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렇다면 영화 ‘위대한 개츠비’는 단순히 고전 문학을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일까요? 사실 그 이상입니다.
이 영화는 사랑, 성공, 사회적 지위, 자아실현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갈망하는 가치를 담아낸, 말 그대로 욕망의 거울 같은 작품입니다.
개츠비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되죠.
이번 글에서는 단순히 줄거리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영화 속에 담긴 메시지와 상징, 그리고 스콧 피츠제럴드가 이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깊은 의미까지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위대한 개츠비’가 왜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이야기인지, 그 이유를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1. 인생을 던진 사랑, 영화 '위대한 개츠비' 줄거리
영화의 배경은 1922년, 미국 뉴욕의 롱아일랜드 지역입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후 경제 호황을 맞이하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고, 이른바 ‘재즈 시대’로 불리는 시기였죠.
술은 금지되었지만 암암리에 소비되었고, 돈과 쾌락, 허영심이 사회를 지배하던 시기였습니다.
주인공 닉 캐러웨이는 중서부 출신의 청년으로, 월스트리트에서 증권 일을 하기 위해 뉴욕에 올라오게 됩니다.
그는 웨스트 에그라는 지역의 작은 집에 거주하며, 그 지역의 대저택 주인, 제이 개츠비와 이웃이 됩니다.
개츠비는 매주 금요일마다 호화로운 파티를 여는데, 참석자들은 대부분 그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 채 그의 부를 즐깁니다.
닉은 우연히 파티에 초대되어, 그곳에서 개츠비를 만나게 되었고, 점차 그와 가까워진 닉은 점차 개츠비의 진짜 정체와 과거를 알게 됩니다.
그는 원래 가난한 청년이었으나, 사랑했던 여인 데이지를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이뤄낸 인물이었습니다.
데이지는 닉의 사촌이며, 현재는 상류층의 남성 톰 뷰캐넌과 결혼해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츠비는 여전히 데이지를 사랑하고 있었고, 데이지 역시 다시 만난 그에게 흔들리게 됩니다.
이후 이들은 다시 재회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데이지는 결국 톰의 세계로 돌아가고, 개츠비는 그녀를 대신해 사고의 책임을 지고 살해당하게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개츠비의 장례식에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습니다. 닉은 허망함과 환멸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가며, ‘위대한 개츠비’라는 회고록을 씁니다.
2. 녹색 불빛과 재의 골짜기: 영화 속에 숨겨진 상징들
'위대한 개츠비'를 단순한 로맨스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지만, 이 영화는 철저히 상징적이고 비판적인 작품입니다.
영화 곳곳에 숨겨진 상징을 해석하면, 개츠비의 이야기가 더욱 깊이 있게 다가옵니다.
가장 상징적인 요소는 녹색 불빛입니다.
개츠비의 집에서 바라보이는 데이지의 집 끝 부두에 위치한 이 불빛은, 그의 꿈과 희망, 사랑, 그리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상징합니다.
개츠비는 매일 밤 이 불빛을 응시하며 살아갑니다.
그는 과거의 사랑을 다시 붙잡기 위해 현실을 외면하고, 스스로의 삶과 정체성마저 바꿔버린 인물입니다.
그가 바라보던 녹색 불빛은 그저 데이지의 집에 있는 조명이 아니라,
그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중요한 상징은 T.J. 에클버그의 안경 광고판입니다.
이 광고판은 도시와 도시 사이, 이른바 ‘재의 골짜기’에 위치한 허름한 공간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곳은 도시에서 버려진 자들의 삶, 노동자와 빈자들이 밀집한 지역이죠.
안경은 마치 신의 눈처럼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이는 도덕적 가치가 사라진 사회, 인간에 대한 무관심, 자본주의의 비정함을 고발하는 장치입니다.
개츠비가 여는 파티는 겉으로는 화려하고 흥겹지만, 그 안에는 부에 대한 과시와 허영, 그리고 정체성의 혼란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의 저택으로 몰려와 술을 마시고 음악에 취하지만, 정작 개츠비가 어떤 사람인지, 왜 이런 파티를 여는지에 대해선 관심조차 두지 않습니다. 파티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 떠나고, 개츠비는 다시 혼자 남죠.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즉 겉으로는 연결돼 있지만 속으로는 단절된 인간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진심 없는 교류와 피상적인 만남이 가득한 사회를 상징하는 장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3. 스콧 피츠제럴드가 말하고자 한 아메리칸 드림의 실체
개츠비는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캐릭터’입니다.
가난한 청년이 상류층이 되기 위해 자신의 이름, 배경, 말투, 심지어 신분까지 바꾸죠.
그는 단지 돈이 아니라, ‘사랑을 얻기 위한 자격’을 갖기 위해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이 꿈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작품을 통해 말합니다.
개츠비가 이룬 모든 부는 정당한 과정이 아닌 범죄와 불법 거래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며,
그가 되찾고자 한 데이지는 이제는 과거에 그가 알던 여인이 아닙니다.
그는 과거에 대한 집착, 이상화된 사랑에 스스로를 가두고, 결국 비극을 맞이하죠.
이러한 개츠비의 이야기는 단지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미국 사회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되는데,
‘아메리칸 드림’은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지만,
실제로는 출신, 계급, 네트워크 등의 장벽이 존재하고, 그 꿈은 허상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죠.
'피츠제럴드' 자신 역시 ‘위대한 개츠비’에 담긴 꿈과 좌절, 허상의 감정을 직접 겪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젤다 세이어'를 사랑했지만, 젊고 무명이었던 시절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사랑을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결국 젤다와 결혼하긴 했지만, 그들의 관계는 끊임없는 갈등과 불안정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작가로서도 그는 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괴리를 느꼈습니다.
일시적인 명성과 찬사를 누리기도 했지만, 작품 활동과 삶의 방향성에 대해 회의감을 품은 채 점점 내면적으로 무너져갔습니다.
그런 그의 경험과 감정들이 고스란히 작품 속 개츠비에게 투영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지만 끝내 가질 수 없었던 감정, 부와 명예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그리고 과거를 되돌리려는 집착까지 모두 피츠제럴드 자신의 그림자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온슬의 감상: 그의 위대함은 무엇이었을까
영화 ‘위대한 개츠비’는 단지 1920년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이 시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SNS를 통해 보여지는 삶, 소비와 허영으로 포장된 인간관계,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흔들리는 개인의 모습은 너무도 익숙한 듯 합니다.
개츠비처럼 우리도 ‘무언가를 위해 살아간다’고 믿지만, 그 끝이 허망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를 향해 말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화려한 영상미, 세련된 음악, 아름다운 의상들로 채워진 영화는 단지 ‘멋있는 영화’를 넘어서, 인간의 내면과 욕망을 냉정하게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스콧 피츠제럴드가 직접 마주했던 세상의 민낯이 고스란히 담겨 있죠.
그렇다면 개츠비는 왜 ‘위대한(Great)’이라는 수식어를 얻었을까요?
그는 거짓된 신분과 불법적인 부를 통해 사랑을 되찾으려 한 인물로,
현실을 외면했고, 과거에 집착했으며,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은 완벽해서가 아니라, 누구보다 순수하게 사랑했고, 끝까지 꿈을 믿었다는 점에서 비롯됩니다.
현실에 맞춰 타협하기보다, 이상을 향해 끝까지 달려갔던 한 남자.
그 모습은 어쩌면 우스울 수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순수함이기도 합니다.
개츠비는 비극적인 인물이지만, 그렇기에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위대한’ 존재가 아닐까요.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다시 개츠비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녹색 불빛’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고, 그 불빛이 진짜인지, 아니면 우리 스스로 만든 환상인지조차 모른 채 그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걸음을 멈추고, 내가 바라보는 그 불빛이 정말 내 꿈이 맞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함께보면 더 좋은 온슬의 감상 >
혹시, 스콧 피츠제럴드라는 인물이 이 영화 속 개츠비 너머로 더 궁금해지셨다면,
그가 실제 등장하는 또 다른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도 함께 감상해보시길 추천드려요.
1920년대 예술가들이 활약하던 ‘그 시대의 공기’ 속에서 피츠제럴드를 다시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