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기억을 ‘내 삶의 기록’ 정도로 여기곤 합니다.
어릴 적 추억, 가족과의 순간, 내가 지나온 경로들을 되짚을 수 있는 기준점이죠.
그런데 그 기억이 하나씩 사라진다면 우리는 과연 여전히 ‘나’일 수 있을까요?
<스틸앨리스(Still Alice)>는 이런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리사 제노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언어학 교수 앨리스 하울랜드가 조기 발병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으면서 겪는 변화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주인공 역을 맡은 줄리안 무어는 실제 알츠하이머 환자와 가족들을 직접 만나며 연기를 준비했고, 그 결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병의 무서움을 ‘드러내기 위해’ 연출된 자극적인 장면이 없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차분하고 일상적인 장면을 통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틸앨리스>는 단순한 병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기억을 잃어가는 인간’과 ‘그런 이를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영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1. 조기 발병 알츠하이머, 앨리스의 현실
앨리스는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언어학을 가르치는 교수입니다.
그녀는 명석한 두뇌와 성실함으로 학문적인 성공을 이룬 인물이자, 세 자녀를 둔 엄마, 그리고 한 남자의 아내로서,
가정적으로도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는 수업 도중 단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러닝 코스에서 길을 잃는 등 이상한 증상을 겪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과로나 나이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밀 검사를 받아본 후 그 결과는 너무나도 충격적이게도 조기 발병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으며,
심지어 유전적 요인이 포함된 형태였습니다.
아직 50세밖에 되지 않은 그녀가 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앨리스 본인과 그녀의 가족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후 앨리스는 점점 단어를 잊고,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결국 딸의 얼굴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영화는 이 과정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고
단순한 감정 연출을 넘어, 앨리스가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과정을 고통스럽지만 담담하게 따라갑니다.
특히 인상 깊은 장면은 그녀가 스스로에게 영상편지를 남기며 자살 계획을 세우는 부분이었는데
병이 더 깊어지기 전에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시도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나중에 그 영상의 존재조차 잊어버립니다.
영화는 앨리스와 딸 리디아의 관계 변화에도 집중합니다.
처음에는 예술가의 길을 가겠다는 리디아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하던 앨리스였지만, 병이 진행되면서 점차 딸의 삶을 받아들이고 지지하게 됩니다.
그 과정 속에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감정적으로 가까워지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깊어지죠.
단순한 모녀 간 화해를 넘어, 병이라는 상황이 오히려 관계를 더 진심으로 마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장면으로 다가옵니다.
2. 기억이 전부는 아니다
<스틸앨리스>는 ‘기억’이라는 요소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억’이 곧 ‘나 자신’을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기억이 사라져도 사람의 감정과 사랑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보여줍니다.
앨리스가 점점 단어를 잊어갈수록,
그녀는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깊은 불안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불안은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데,
관객은 앨리스의 눈을 통해 세계를 보고,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한 혼란과 공포, 그리고 작은 희망까지 모두 함께 경험하게 됩니다.
영화 후반, 딸 리디아가 연극 대사를 낭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조용히 그 말을 듣고 있던 앨리스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꺼냅니다.
이미 대부분의 언어 능력을 잃었지만, 감정은 여전히 그녀 안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그 감정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이 짧은 순간은 영화가 전하고자 했던 모든 메시지를 단 하나의 단어로 깊이 있게 담아내며,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 여운을 남깁니다.
이 영화는 가족의 역할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상적인 가족만이 병을 이겨낼 수 있다’는 식의 교훈은 없습니다.
오히려 스틸앨리스는 각자가 현실적인 고민과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으면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조용히 보여줍니다.
영화는 앨리스의 가족들 각자의 선택들로 하여금 어떤 선택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기보다,
인생이 가진 복잡성과 가족이라는 관계의 다양한 얼굴을 있는 그대로 그려냅니다.
3. 알츠하이머 환자 가족의 현실: 지치지만 놓을 수 없는 관계
실제 알츠하이머 환자를 둔 가족들은 영화에서 그려지는 모습보다 더 현실적인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간병은 단순한 육체적 노동이 아니라,
환자가 점점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감정적인 고통까지 포함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잊고,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때로는 공격적인 행동까지 보일 수 있는 상황 속에서 가족은 큰 혼란을 겪게 됩니다.
한국에서도 치매, 특히 알츠하이머 환자가 증가하고 있으며,
간병 부담은 대부분 가족에게 전가되고 있습니다.
간병 서비스는 부족하고, 정부 지원도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많은 가족이 경제적·정신적 소진을 겪게 되고
이로 인해 간병 우울증, 가족 간 갈등, 사회적 고립 같은 문제들이 뒤따릅니다.
<스틸앨리스>는 그런 현실을 정면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그 이면을 관객에게 충분히 상기시켜 줍니다.
영화 속 가족들은 처음에는 혼란과 부정을 겪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받아들이고, 각자의 방식으로 앨리스를 돌보려 노력합니다.
이런 변화는 실제 알츠하이머 환자 가족들이 겪는 감정의 흐름과도 매우 닮아 있습니다.
영화는 무엇보다, 환자를 하나의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합니다.
병이 깊어져도 앨리스는 여전히 누군가의 아내이고, 엄마이며, 감정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않는 것, 바로 거기서부터 진짜 간병이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온슬의 감상: 기억 너머에 남는 것들
<스틸앨리스>는 기억을 잃어가는 여성의 이야기이자,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알츠하이머를 단지 슬프고 두려운 병으로 그리지 않고
오히려 그 병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며 정말로 붙잡아야 할 가치들
"존엄성, 사랑, 관계, 그리고 이해"에 대해 조용하지만 깊은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기억을 모두 잃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그 감정은 단어로 표현되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하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간다움의 마지막 조각일지도 모릅니다
<스틸앨리스>는 특히 알츠하이머 환자 가족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깊은 공감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사회가 치매라는 현실을 어떻게 마주하고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도 함께 던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기억이 희미해질수록,
그를 바라보는 가족의 시선과 마음은 더 분명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잔잔하게 마음을 울리는 듯 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며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억이 사라진다고 해서, 한 사람의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닐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오히려 우리가 기억해주고, 옆에 있어주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일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새삼 느꼈습니다.
이 영화는 단지 눈물만을 남기고 끝나는 슬픈 이야기가 아닌,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을 조용히 건네고,
그 답을 마음 깊은 곳에서 천천히 되새기게 하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틸앨리스는 아픈 영화이지만,
동시에 따뜻한 영화이고,
시간이 흘러도 문득 떠오를 것 같은, 기억 속에 오래 머무는 이야기입니다.
사라지는 기억 속에서도 끝내 남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누구도 잊힌 존재가 아닐 것입니다.

얼굴이 아닌 마음을 보는 법, 영화 '원더' 리뷰
다름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바라보는 것의 힘. '스틸앨리스'와 함께 보면 더욱 깊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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